술만 마시면 오시는 그 분..
[노컷뉴스 박성아 기자]
"술만 마시면 '그 분'이 오세요."
직장인 이 모씨(28·IT업종)는 회식자리가 늘 꺼려진다. 술만 먹으면 시비를 거는 상사 때문. 이 씨는 "기분 좋은 회식자리여야 하는데, 상사 피해다니느라 음식을 제대로 먹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처럼 고약한 '술주정' 때문에 피해를 보거나 혹은 당사자로서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이씨의 상사처럼 평소에는 조용하던 사람이 술만 먹으면 수다쟁이가 되거나, 심해지면 폭언과 폭력을 서슴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런데 이러한 술주정이 반복되거나 심해질 경우 그냥 '으레 그러려니' 하고 지나쳐서는 안된다. 이는 우리가 흔히 알코올 중독이라 부르는 알코올 의존증의 증상 중에서도, '정신장애'를 의심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술주정, 그냥 넘겼다가는 '뇌'가 고생
'정신장애'는 극단적으로 술에 취해 폭력, 방화, 살인 등 범죄를 저지르는 일부 알코올 중독자들의 반사회적 인격장애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술주정이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 시작하고, 스스로 '심각하다'고 인지한 순간 우리의 뇌는 이미 알코올에 의해 손상됐거나 손상이 진행되고 있는 상태다.
알코올중독전문 진병원 양재진 원장은 "알코올에 의해 뇌가 손상되면 여러가지 장·단기적인 정신 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며 "한번 손상된 뇌세포는 회복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알코올에 의한 정신장애는 크게 ▲인지기능 장애 ▲ 성격의 변화 ▲ 사고방식의 변화 등이다. 인지기능 장애는 기억력에 문제(장애)가 생기는 것으로 보면된다. 일반인들이 술을 먹고 종종 겪는 일시적 기억장애, 흔히 '필름이 끊긴다'고 하는 상태도 이에 포함된다. 양재진 원장은 "뇌는 기억을 만드는 다음 저장을 하는데, 알코올이 기억의 저장 단계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기억장애(black out) 증상"이라고 설명했다.
사람들이 흔하게 겪는 음주 후 기억장애는 드문드문 기억이 안나는 증상인데, 때로는 술에 취한 순간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통째로 기억이 없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때, 막상 술에 취한 당사자는 주변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평소처럼 행동하고 완벽하게 귀가까지 마치기도 하는데, 그냥 넘길 일은 아니다.
기억에 장애가 생긴 상황에서 일상적인 행동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살아오면서 대인관계나 평소 생활습관이 몸에 이미 학습돼있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일 뿐이다. 결국 집에 안전하게 들어왔다고 해서 '필름 끊긴' 상태를 아무렇지 않게 넘긴다면, 뇌손상은 계속 진행돼 결국 돌발상황에 대처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양재진 원장은 "단순 기억장애를 방치해두면 점차 사고능력까지 차례로 망가지게 된다"고 전했다.
"'적당한 음주량'은 개인의 알코올분해능력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자신의 음주량을 알아두고, '취하기 전'까지 마시는 절주를 습관화하고, 심각할 경우 반드시 단주를 해야한다"고 양재진 원장은 조언했다.
◈ 알코올 의존증, 내버려두변 성격도 변해
알코올 의존증이 심각해지면 성격의 변화도 나타난다. 우리 뇌의 전두엽 부분이 알코올에 의해 지속적으로 손상을 입게 되면 충동조절능력을 잃게 된다. 술에 취해 비틀비틀 걷는다는지 어지럼증을 느끼는 등의 증상은 교통사고로 머리를 심하게 다친 사람에게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데, 둘다 전두엽에 충격을 받아 조절능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술주정'이라고 하는 유형들을 눈여겨 보면 성격 변화의 패턴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양재진 원장은 "알코올 의존증 환자들의 술주정 패턴은 대개 5단계로 진행이 된다"고 전했다.
즉, 같은 말의 반복 → 목소리 커짐 → 폭언 → 폭력 → 범죄 등으로 점점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술을 마신 뒤 시비를 걸거나, 극단적으로 분노를 억제 하지 못해 흉기를 들고 난동을 부리는 사람들은 알코올에 의해 지속적인 뇌손상을 입어 충동조절능력을 잃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면, 알코올을 통해 불안에서 해방되는 경험을 학습, 강화해서 반복하는 악순환을 되풀이 하게 된다.
문제는 이상 행동이 술을 먹지 않았을 때도 나타나는 상황이다. 과거에 비해 참을성이 없어지고,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며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는 인격장애가 오거나 우울증 등에 시달리는 것이다.
◈ 알콜 의존증 환자가 병원에 가지 않는 이유
알코올 의존은 사고방식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알코올 의존 환자들이 대부분 자신이 환자라는 사실을 부인한다. 이를테면 '내가 알코올중독이면 대한민국에 알코올중독 아닌 사람이 없다'라는 식의 태도는 사고방식 변화 때문에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양재진 원장은 "알코올 의존증 환자들의 방어기전(자신을 방어하려는 심리능력)은 부정, 최소화, 투사, 자기합리화, 분노 등으로 나타난다"며 "이들은 모두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태도에서 나온다"고 설명했다.
알코올은 판단력이나 사고력을 잃게 만들어 환자 본인이 '내 탓'이 아닌 '남 탓(투사)'을 하게 만든다. 또 술을 많이 마시고도 적게 마셨다고 속이는 '최소화'의 방어기전으로도 나타나거나, 아예 마시지 않았다는 '부정'을 하기도 한다. 이는 모두 뇌기능 장애로 판단력을 잃어 일반적이지 않은 심리상태에서 나오는 방어기전으로, 환자들이 알코올 의존에 치료를 강하게 거부하도록 만든다.
◈ "알코올 의존증은 죽음으로 진행 중인 병"
이처럼 술주정은 가볍게 웃고 넘길 일이 아니다. 알코올에 의해 뇌기능에 장애가 오기 시작했다는 증거기 때문이다. 알코올 중독에 의한 평균 사망연령은 51-56세로 일반인 보다 20년 빠르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알코올중독 3대 사인(간경화, 심부전, 사고사)중 사고사는 추락사, 넘어짐, 익사, 교통사고 등으로 음주로 인한 뇌기능 장애 때문에 일어날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재진 원장은 "알코올 의존증은 결국 죽음으로 진행 중인 병"이라며 "금단 증상 중 하나라도 나타나면 단주하는 것은 물론,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랫동안 계속해서 술을 마시던 사람이 어떤 이유에서건 술을 덜 마시게 되면 자율신경계 흥분 증상(손 혀 눈꺼풀 떨림, 혈압 및 맥박 상승, 미열, 땀, 오심, 구토, 불안 증세)을 나타낸다.
심각한 알코올 의존증 환자의 경우, 금단증상이 상상을 초월한다. 시간 ·방향감각 상실하고 의식 혼탁, 망상, 착시, 환각 증상 등을 나타내거나 극도의 공포·불안감에 시달리고, 사경을 헤매기도 한다. 이 지경까지 이르렀을 때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도 사망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양재진 원장은 "심각한 알코올 의존증이 지속되면 대개 5~10년 내에 사망한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알코올 의존증으로 인해 가족들이 떠안게 되는 피해는 막대하다. 실제 알코올 전문병원을 찾는 환자들 보호자의 80%이상이 배우자라고 한다. 양재진 원장은 "환자의 인권도 중요하지만, 폭력과 경제적인 어려움에 노출된 보호자의 인권'도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알코올 의존증 치료는 입원치료(보통 3-4개월)와 외래치료(평균 1-2년), 단주모임(A.A)등으로 진행되며, '평생 단주'를 목적으로 한다.